2017. 10. 29. (일)


고수뿌리를 넣은 육수에 청정원 쌀국수 소스를 첨가해 남편이 직접 쌀국수 요리를 만들었는데, 살짝 데친 숙주는 아삭하고, 얇게 저민 양지머리는 쫄깃하고, 국물은 시원 칼칼하고, 너무 너무 맛 있었다. 전문식당에서 파는 쌀국수 보다 더 맛 있었다.



내가 머리가 꽤 나쁘다는걸 깨닫게 된 계기, 물론 살면서 숱하게 많은 계기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 하나는 내가 요리병신이라는 것이다.


나는 고작, 

베이컨은 그냥 구워서

크래미는 그냥 썰어서

고등어나 갈치는 그냥 구워서

햄이나 소세지는 끓는 물에 데치거나 팬에 구워서

계란은 계란후라이 또는 계란찜 해서

콩나물은 콩나물국 또는 콩나물무침 해서


식료품의 원재료를 그냥 먹거나 익혀 먹거나 단순한 1차 가공만을 거쳐서 먹는다.

어떤 '요리'나 '반찬'을 만들라치면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던 그 백지장이 내 뇌를 점령한다.

미리 적어둔 레시피를 참고하거나, 요리책을 뒤지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따라 만든다.

하필 나에게는 손 맛이라는 행운도 안 따라준다.


반면 남편은 나보다 머리가 좋다.

나는 마파두부용소스, 순두부찌개용소스, 부대찌개용소스를 사서, 그걸 베이스로 요리를 만들었지만, 남편은 본인이 직접 육수내고 양념장소스 만들어서 마파두부, 순두부찌개를 만들어낸다.

동태찌개, 김치찌개, 참치찌개, 갈치조림, 멸치볶음, 볶음밥 등등을 나 보다 훨씬 맛있게 만든다.

나는 이름도 외우지 못하는 향신료들을 꿰고 있다.

닭개장을 만들어 어머니께 대접했고, 동태찌개도 대접해드렸다. 어머니는 처음엔 안 믿으셨다.

돼지 간 고기와 고추장 된장 청양고추 양파 등등으로 볶음쌈장을 만들었는데 너무 너무 맛있다.

어머니도 맛있게 잘 드셔서 종종 남편은 볶음쌈장을 만들어 어머니 밥반찬으로 가져다 드린다.


한동안 TV에 지겹게 방영되던, '남자들도 요리하는 프로그램들'에 시나브로 세뇌되었는지 몰라도, 남편에게는 요리에 대한 기본 상식이 나보다 훨씬 풍부하고, 나처럼 요리를 막연하게 어려워하지도 않는다. TV를 잘 안보는 나에게는, 그것 때문에 요리의 기초 상식을 쌓을 기회조차 없었나보다.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에게 가사분담을 강요한 이후에 남편은 자신의 요리 재능에 눈 뜨게 되었다.

물론 전에도 가끔씩 스파게티를 만들고, 햄버거 속재료를 만들고, 식사 준비를 도와주긴 했지만, 이제는 어떤 요리를 얼마나 맛있게 해줄지 기대된다.


마트의 요리도구와 향신료 코너를 지나칠때면 남편은 나는 왜 이런게 자꾸 사고 싶지? 말한다.

내가 내가 숨겨왔던 남편의 수줍은 재능을 눈 뜨게 했구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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